글 작성자: 청여(淸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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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시 풍천면에 있는 조선후기 유성룡(柳成龍)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교육시설. 사적.

 

 

본 서원의 전신은 고려 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풍산유씨(豊山柳氏)의 교육기관이었는데, 이를 1572년(선조 5) 유성룡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1613년(광해군 5) 정경세(鄭經世) 등 지방 유림의 공의로 유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尊德祠)를 창건였고, 이곳에 위패를 모셨다.

1620년(광해군 12)에는 유림의 공론에 따라 이황(李滉)을 모시는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유성룡의 위패가 옮겨지게 되었다. 그 뒤 1629년(인조 9) 별도로 유성룡의 위패를 마련하여 존덕사에 모셨으며, 그의 셋째 아들 유진(柳袗)을 추가 배향(配享)하였다.

1863년(철종 14) ‘병산(屛山)’이라고 사액(賜額)되었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병산서원은 고려 중기부터 안동 풍산에 있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風岳書堂)에서 비롯되었다. 지방 유림의 자제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으로, 고려 말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왕의 행차가 풍산을 지날 무렵, 풍악서당의 유생들이 난리 중에서도 학문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왕이 크게 감동하여 많은 서책과 사패지(賜牌地)를 주어 유생들을 더욱 학문에 열중하도록 격려하였다.

 

 

 

 

 

입구의 대문인 復禮門(복례문).

'예를 다시 갖추는 문'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복장을 추스르며 마음까지 단속하던 옛 선비의 기풍이 느껴진다.

 

 

 

 

 

입구의 대문인 復禮門(복례문)을 들어서면 만대루를 만납니다.

만대루는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정면 7칸의 누각으로 휴식과 강학의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기둥과 병산의 절경, 그리고 흐르는 낙동강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입니다.

 

 

 

 

 

만대루는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정면 7칸의 누각으로 휴식과 강학의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기둥과 병산의 절경, 그리고 흐르는 낙동강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입니다.

 

 

 

 

 

만대루에서 바라보는 풍경,

 

 

 

 


만대루 뒤 담장 너머 배롱나무꽃

 

 

 

 

 

풍천면 병산리에 자리한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과 그 아들 류진을 배향한 서원이다. 모태는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고려 때부터 안동부 풍산현에 있었는데,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 고장에 왔을 때 면학하는 유생들을 가상히 여겨 내려준 토지 8백 두락을 받기도 했다. 조선조인 1572년에 류성룡이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불에 탔으나 광해군 2년(1610)에 류성룡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를 중심으로 한 사림에서 서애의 업적과 학덕을 추모하여 사묘인 존덕사를 짓고 향사하면서 서원이 되었다. ‘병산서원’(屛山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은 것은 철종 14년(1863)의 일이며 1868년에 대원군이 대대적으로 서원을 정리할 때에 폐철되지 않고 남은 47곳 가운데 하나이다.

 

 

 

 

 

 

사당인 존덕사는 류성룡과 류진의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정기. 비정기 제향 의례를 시행하고 있는 곳이다.

존덕사의 문은 잠겨 있지만 양 옆의 보호수인 배롱나무는 풍성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1614년(광해 6)에 우복 정경세, 창석 이준, 동리 김윤안, 정봉 안담수 등 문인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존덕사를 창건하여 선생의 위판을 봉안 하였다.

 

 

 

 

 

존덕사 내삼문 앞 뜰에 핀 배롱나무 보호수, 

배롱나무 수령이 380년이나 된 보호수로서 나무 둘레는 0.8m이다.

 

 

 

 

 

존덕사 옆의 배롱나무입니다.

엄청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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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에서 본 복례문이다.

다락층에는 가마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병산서원을 뒤돌아 나오며 안동시에 있는 체화정으로 동선을 옮겼습니다.

 

 

 

안동시 소재 대한민국 보물 제2051호 체화정

 

안동 체화정(安東 棣華亭)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상리2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 건축물이다. 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200호로 지정되었다가, 2019년 12월 30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205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영조 37년(1761)에 진사 만포 이민적이 세운 정자로 학문을 닦던 곳이다. 그 후 순조(재위 1800∼1834) 때 국가에서 충신, 효자, 열녀를 기리기 위해 마을에 정문을 세우는 정려를 받은 이한오 선생이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효도하던 곳이기도 하다.

 

 

안동 체화정은 1761년에 만포(晩圃) 이민적(李敏迪)이 학문을 닦기 위해 세운 것으로 그의 맏형인 옥봉(玉峰) 이민정(李敏政)과 함께 이곳에 기거하며 형제의 우애를 돈독히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체화정이라는 당호는 형제간의 화목과 우애를 상징하는 것으로 시경(詩經)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하며 당호 현판의 글씨는 사도세자의 사부를 지낸 삼산 류정원이 썼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체화정은 많은 시인묵객들이 방문해 적은 시판이 게시돼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역사적 가치를 파악할 수 있으며, 체화정의 연지는 별서정원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사상인 신선 사상과 음양론, 천 원 지방설 등의 영향을 받아 방형의 연지와 세 개의 원형 섬을 조성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별서정원에서 나타나는 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17세기 중창 때의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건물의 전체 구성이 같은 맥락으로 이어져 있어서 완전성을 갖추고 있는 건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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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화정의 창호는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하고 창의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등 18세기 후반 조선 후기 목조건축의 우수한 수준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정자의 전면에 연못과 세 개의 인공섬을 꾸미고 적극적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조성해 조경사적 가치도 높은 누정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체화정 반영은 최고의 핫포인트인데

연못의 물이 혼탁하고 부유물 청소가 안돼 반영이 안좋은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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