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무산사 베롱나무 붉은 꽃
함안 칠서 무산사 베롱나무 꽃을 찾아서
역사의 흔적을 따라 여행하면 종종 다른 여행이나
행위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묘미를 갖곤한다.
상고의 암각화를 찾아가는 길이나 조선의 향교 또는
서원을 방문할 때라면 계흭하고 준비한 후 가는길이
비록 잠을 서쳤다고 할지라도 잔잔한 매력적 흥분으로
그 어떤 피로감도 느끼지 못한다.


그럴 무렵, 풍기가 평소 존망하던 대선배 안향의 고향임을 알고, 그를 모시는 문묘를 짓고 학당을 세우니 이가 조선 최초의 사립 중등교육 기관인 ‘백운동서원’이다. 백운동서원은 향후, 명조의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으로 부른다. 합천에서 태어나 함안군 칠원읍 무릉리에서 성장한 주세붕의 본가에는 지금 ‘무산사’가 있다. 후대인들이 선생을 기려 사후에 세운 ‘무산서당’이 그곳이다

주세봉은 상주가 본관으로, 1495년 합천군 천곡리에서 태어났다.
일찍 함안 칠원 무릉리로 옮겨와 성장하였으며
향연 60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상주 주씨 시조는 주이로 당나라 사람이며
신라에 귀화하여 상주 총관등의 벼슬을 지내며 상주에 정착했다.

이후, 직제학. 도성지. 대사성. 호조참판을 엮임한 선생은
1551년 황해 감사로 있으며 해주에 수양서원을 창설하였다.
사후에는 예조판서에 추종되었으며 저서로는 무릉잡고가 있고
편서로는 죽계지. 동국명신언행론. 심도이훈. 등이 있으며
장가로 도동곡. 유 현가. 엄연 곡, 태평곡 및 단가 군자가 등을 지었다.

풍기군수의 명을 받고 부임한지 해가 바뀌어
지리와 풍속을을 파악한 주세봉은
그곳의 풍토에 적합한 인삼 재배법을 정리했다.
향리 백성은 이에 감사비를 세웠다.

무당서당 뒷편에는서 광풍각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고
광풍각의 내문이 있습니다.
서당을 중심으로 뒤쪽에는 무릉사, 광풍각, 장판각이
이열로 서 있는곳은 40%쯤 되어보이는 가파른 경사면에 있으며
베롱나무가 탐스러운 꽃드을 피우고 있다.

광풍각의 출입문 제월문이다.

무산사의 광풍각에는 주세봉 선생의 연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곳 초상은 조선전기 문신학자인 주세봉의 초상화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58세때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의 원본을 후송들이 다시그린 것이다.

초상이 봉안 되어있는 광풍각은
초상을 모셔두기 위해 12대 손 주학표가 세운 것이다.

고아풍각 오른편 외부에서 본 광풍각이다.

측면에서 본 무릉사.

광풍각 오른편에 있는 장판각이다.
장판각은 우릉잡고, 수구집, 구봉집책판 352매 등이 소장 되어 있다.

광풍각 왼편의 배롱나무 숲

광풍각에서 내려다본 무산서당 배후

무릉사는 주세봉 선생의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무산서당을 중심으로 뒤쪽에 무릉사(武陵祀), 광풍각(光風閣), 장판각(藏板閣)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신재 주세봉선생이 6살 때 소학을 읽고 이어 사서오경을 접하므로, 글을 읽고 쓰는 집중이 남달라 일찍부터 주위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어머니의 머리에 이가 많자 자신의 머리를 맞대어 이를 옮겨 받았다.
무릉사의 출입문 내문입니다.

이런 얘기는 나중에 세인에게 알려져 효자로 칭송을 들었으며,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어린 몸으로 흙을 지고 가서 봉분을 만들고, 고기와 장을 먹지 않았다. 심지어 기르던 개가 항상 그의 곁을 따라다녔는데, 개조차도 3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아 사람들은 주세붕의 효성에 감동되어 그런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주세붕은 흉년이 들자 재산을 털어 백성들을 구황하였는데 실적이 도내 제일이었다.
풍기군수에 제수된 지 1년 뒤 조정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포상 문제를 논했다.

한편, 풍기군수로 있던 신재 주세붕은 어느 날 형제간에 발생한 재산 다툼을 재판하는데,
모든 정황을 듣고 난 그는 다음과 같이 명했다.

“다툼을 한 형제는 들어라. 내 모든 정황을 파악하고 이에 판결을 내리니 두 사람은 이를 즉시 이행하라. 형은 아우를 업고 동헌의 뜰을 돌라. 그 마침은 내가 다시 명을 내리겠노라.”
이때 모여들어 구경하던 향리 주민들은 주세붕의 판결을 비웃었다. 형제도 이 야릇한 판결에 의아해했지만, 군수의 명을 따라 형은 아우를 업고 넓은 뜰을 걷기 시작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르자 처음의 기세와는 달리 성장한 성인을 업고 돌던 형은 서서히 지쳐갔다. 아우를 업은 형의 고쳐 업는 동작이 잦아지자 주세붕은 그들을 크게 꾸짖었다.

“너희는 본래 의좋고 다정한 형제였을 터이다. 오래전 형은 어린 아우를 업고 동네를 돌며 놀았고, 아우는 형을 믿고 그 등에 업혀 세상을 구경하였노라. 이렇듯 다감한 정을 나누던 형과 아우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사소하고 별것도 아닌 재산을 두고 다퉜으니, 이는 형제의 도리를 어긴 것이요 하늘의 의를 버린 것이다. 이런 너희에게 무슨 도리와 이치가 삶을 돕겠느냐. 지하의 부모와 조상들은 이런 너희를 지켜봄에 그 실망이 얼만큼이겠느냐.”
주민 중 몇몇이 눈가로 옷소매를 가져갔고, 뜰에 우두커니 서있던 형과 아우는 서로의 온기를 느끼는 포옹을 하고 울며 서로에게 사과했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왕의 명을 받들며 공무를 수행한 관료는 숱하다. 그중에는 청백리로 불리는 이들이 있어 관료 중 으뜸이었다. 청백리란 결백하기만 하고 공사업무 수행에 무덤덤한 이들을 칭하는 게 아닌, 부정과 거리가 멀면서도 성실하고 유능한 이들이었다.

조선조에서는 이들을 청백리, 염근리, 근근인, 염근 등 다양하게 불렀으며, 고인이 된 이를 청백리, 살아 있는 이를 염근리라 하였지만, 오늘날에는 이들 모두를 청백리라 부른다. 그들이 모두 고인이 된 탓도 있지만, 간 편을 구하는 현대에는 구별하여 칭하는 버릇을 거부하는 탓도 있으리라.

이상 함안 칠서 무산사 배롱나무 꽃들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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