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작성자: 청여(淸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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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산인 고려동 유적지 자미화 (배롱나무꽃)

 

 

 

고려 말에 성균관의 진사였던 이오 선생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의 유민으로 절의를 지키기로 결심
하고 백일홍이 만발한 이곳을 택하여 담을 쌓고 거처를 정하였다. 그리고 고려 유민의 거주지임을 뜻하는 고려동학이란
비석을 세웠다. 여기에서 담안 혹은 장내라고 하는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 자미단(紫薇) 자미화는 아직 피지를 않았는데 8월 15일 이후에나 필 것으로 보입니다.

 

 

 

 

 

 

 

 

선생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하지 않았고, 아들에게도 새 왕조에서 벼슬하지 말 것과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담 안에 주거와 우물 전담 등을 마련함으로써 후손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터를 닦았다. 이후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후손들은 600년이 넘게 이곳에서 살아왔고 고려동이라는 이름도 전하고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재령 이 씨 후손 30여 호가 모여 살면서 선조의 뜻을 기리고 있다. 마을 안에는 고려동학표비, 고려동담장, 고려종택, 자미단, 고려 전 3,000여 평, 자미정, 율간정, 복정 등이 있었으나, 이들 건물은 한국전쟁 동안에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이후 복원되었다. 호상공의 생가로 알려진 주택만이 제 모습을 지키고 있으나, 그마저 200여 년 전의 것이라고 한다.」

 

 

 

 

 

 

 

 

선생이 처음 이곳에 와서 은거하실 때 숲 속에서 자미화(백일홍)가 난발한 것을 보고 이곳에 복거(卜居)했는데, 이 자미화는 선생의 후손들과 성쇠를 같이 한다고 전하고 있다. 배롱나무꽃은 백일동안 핀다고 하여 백일홍이라고는 하지만 "자미화"는 목백일홍이라 부르기 이전의 이름이라고 한다.

 

 

 

 

 

 

 

 

이른 아침시간 해가 뜨는 시각 긴 장마에서 깨어나 오랜만에 맞는 일출인데 햇빛이 너무 강합니다.

노출을 아무리 조정해도 이렇게 밖에는... 배롱나무꽃을 실루엣으로 하는 방법 외는 방법이 없습니다.

 

 

 

 

 

 

 

 

고려동 유적지 역사에서 나오는 "자미화"는 아래와 같은...

여름 꽃에는 연꽃이 가장 유명하지만 자미화 (紫薇花)도 있다.

자미화는 꽤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꽃으로, 송나라 시기 시 구절 속에도 등장한다. 

자미화는 여름 꽃으로 개화기는 6월부터 9월까지 꽤 길며, 약 100일에 걸친다 하여 목백일홍 (木百日红)이라고도 부른다. 

 

 

 

 

 

 

 

 

자미화 (紫薇花) 곧 배롱나무(목백일홍)를 말한다. 
이오가 고려 말기에 응천으로부터 의춘을 왕래하면서 함안 모곡에 이르러 무성한 수풀 사이에 자미화(紫微花배롱나무)가 활짝 핀 것을 보고 사랑스러움에 말을 멈추고 그 아래 천천히 거닐다가 마침내 이곳을 살 곳으로 정했다고 한다.

 

 

 

 

 

 

 

 

자미단(紫薇)은 처음 모은이 지켜보았던 배롱나무를 600여 년 지난 지금도 단을 쌓아 자미단(紫薇壇)이라는 이름을 붙여 보호하고 있어 후손들의 남다른 숭조(崇祖) 정신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자미화 (紫薇花)는 오래전에 중국에서 귀화했으며 
꽃말은 "부귀" "멀리 떠난 친구를 그리워한다"입니다.

"꽃은 더 멀리 두고 보아야 더 예쁘고 아름다우며 향기 또한 멀수록 맑다 합니다"

 

 

 

 

 

 

 

 

올해는 배롱나무 개화상태가 좋지 않아 담장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솟을대문을 거쳐 들어가면
바로 정면에 보이는 종택의 사랑채 계모당입니다.

 

 

 

 

 

 

 

 

이오는 이곳에 담장을 쌓고 고려 유민의 거주지임을 뜻하는 '고려동학'이라는 비석을 세워 논과 밭을 일구어 자급자족하였다. 그는 아들에게도 조선왕조에 벼슬하지 말 것과 자기가 죽은 뒤라도 자신의 신주를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도록 유언하였다. 그의 유언을 받든 후손들은 600여 년에 이르는 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이에 고려동이라는 이름으로 오늘까지 이어 오고 있다. 현재 마을 안에는 고려동학비, 고려동담장, 고려종택, 자미단, 고려전답 3,000여 평, 자미정, 율간정, 복정 등이 있다. 이들 건물은 한국전쟁동안에 대부분 소실된 이후 복원된 것이다.

 

 

 

 

 

 

 

 

복 정

고려동 유적지  장내동 안에 있는 우물 "복정"

 

 

 

특이하게 배롱나무 보라색 꽃이 피어 있는 사당입니다.

 

 

 

 

 

 

 

불사이군의 정신이 깃든 함안 고려동 유적지

 

 

 

※ 아래 사진은 아직 자미화의 꽃이 피지 않아 지난 2021 사진으로 대체하였습니다.

 

 

고려가 망하자 여러 현인들과 송도 교외의 두문동으로 들어가 망복수의의 결의를 표명하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산인면 모곡리에 터를 정해 은거했습니다. '두문불출'이란 말이 이때 생겨난 말인데, 두문동에 들어간 사람은 전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안에서만 있으니 나온 말입니다. 고려의 국운이 약해졌던 고려 말, 삼은으로 불리던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는 대표적인 고려 말의 충신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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