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작성자: 청여(淸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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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년 해맞이 광장 구룡포 근대화 역사거리

 

포항 구룡포에는 100여 년 전의 시간이 그대로 멈춰있는 공간이 있다. 우리네 집과는 다른 모양의 집들이 줄지어 있는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포항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바다와 육지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호미곶 상생의 손과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는 죽도시장을 필두로 맛있는 구룡포 대게와 과메기, 그리고 내연산 보경사와 운제산 오어사가 이어진다. 포항 경제의 거목이자 멋진 야경을 자랑하는 포스코도 빼놓으면 섭섭하다. 이 정도면 대략 포항의 내로라는 여행지는 거의 둘러본 것 같다. 여기에 2012년 개관한 구룡포 근대역사관을 더해보자. 그동안 해돋이 명소로, 또 맛있는 바닷가로만 저장해 두었던 포항이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경상북도 포항시 구룡포는 1900년부터 일본 어부들이 어업 근거지로 삼으면서 근대 항구가 되었다. 일본인들은 일제강점기부터 본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구룡포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구룡포에 정착한 일본인 가운데는 가가와현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일본 타 지역 출신들과 경쟁관계에 있었으나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2차례에 걸친 축항 공사를 통해 방파제를 쌓고 일본인 거리를 확장했다. 구룡포의 조선인들은 상당수가 일본 선주들에게 고용돼 어로 노동자로 일했다. 구룡포의 조선인과 일본인 거주 공간도 달랐다. 일제강점기 극소수의 일본 선주들은 전체 어획 소득의 절반가량을 가져갔다. 일본인들이 부를 늘려감에 따라 구룡포의 일본인 거리도 계속 확장됐다. 그러나 1945년 갑작스러운 패망으로 일본인은 자신들 나라로 돌아갔다. 포항시는 2011년부터 ‘구룡포 근대역사문화거리’를 조성했다. 가가와 출신 어부들의 중심인물로 구룡포에서 부를 쌓은 하시모토가 1923년 지은 일본식 집은 구룡포 근대역사관이 되었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하시모토의 집과 일본 가옥의 등록문화재 지정 신청을 보류했다. 구룡포 근대역사문화거리는 역사 인식의 측면에서 계속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포항여행 호미곶 해맞이광장 상생의 손"    "니가 날아봐야 내손안에 있소이다."

 

구룡포 해맞이 광장 새천년기념관 바로 앞에는 이렇게 다리를 하늘로 곧게 뻗은 대형문어 조형물이 자릴 잡고 있습니다.

 

 

경상북도 포항시 구룡포항에 일본 어부들이 드나들기 시작한 시기는 1900년경이다. 1902년 돔을 잡으러 나선 일본어선 50여 척이 구룡포에 정박한 일이 있었고, 1909년 고등어 풍어를 계기로 구룡포에 아예 눌러 살려는 일본인들이 늘어났다. 이미 1883년 조일통상장정이 체결되었고, 1889년에는 조일통어장정에 따라 일본 배도 조선 해역에서 어업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은 어업 정책이 혼선을 빚은 데다 남획으로 근해 어획이 고갈된 상태였다. 근대 어업을 조선보다는 일찍 받아들인 상태여서 배와 도구 모두 조선 어부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구룡포는 일본 어부들이 정착하기 전에는 조선인이 살지 않는 지역이었다는 이야기가 정설인 듯 전해지지만, 최근 구술 연구 등에 따라 밝혀진 바에 따르면, 조선인은 바닷가 쪽이 아니라 해안 구릉지 위쪽에 살았다. 구룡포에 이주한 일본인들은 구릉지 아래 바닷가 쪽에 정착했다. 구룡포가 항구로 발전해 나가는 초기부터 일본인과 조선인은 거주 지역이 달랐고, 이 구도는 해방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일본인 이주자가 많아지면서 일본인 거리는 바닷가를 따라 점점 길어졌지만, 조선인이 사는 구릉 쪽으로는 확장되지 않았다.

 

본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구룡포로 건너온 일본인 가운데는 시코쿠의 가가와현 어부들이 많았다. 가가와에서 내해(內海) 건너 혼슈 와카야마현 등 다른 지역 출신들도 있었지만, 가가와현 출신의 비중이 절반 이상이었다. 이들은 ‘가가와현민회’를 구성해 뭉쳤는데, 현민회의 중심 인물은 하시모토 겐키치(橋本善吉)였다. 하시모토는 1909년 구룡포에 정착해 활어를 나르는 사업으로 부를 축적했다. 하시모토는 1923년 일본인 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2층 저택을 지었다. 평범한 일본식 점포 주택과는 격이 다른 집이었다. 일본에서 직접 자재를 가져다 완벽하게 일본식으로 지은 하시모토의 집이 현재 바로 ‘구룡포 근대역사관’으로 쓰이는 건물이다.

 

하시모토가 이끄는 가가와현민회와 경쟁하는 관계였던 다른 일본 지역 출신들은 와카야마현에서 온 도가와 야스브로(十河彌三郞)다. 하시모토와 도가와는 방파제를 쌓고 항구를 만드는 일에는 협력했다. 일본인의 집 2층에서 바다로 직접 다이빙을 할 수 있었다고 할 정도로 일본인 거주지는 바다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서나 고기잡이를 위해서나 축항은 시급한 과제였다. 1926년 1차 축항 작업이 완공되었고, 1935년 2차 축항 공사가 완료됐다.

 

일본인들은 50m쯤 더 바다 쪽에 방파제를 쌓고자 했으나, 미역이 붙어 자라는 바위(곽암) 주인들인 조선인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건 말고는 일본인과 조선인이 구룡포에서 부딪친 사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조선인은 대부분 영세한 어민이거나 일본 어선에 고용된 신세였고, 거주 공간은 아예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구룡포의 조선인 사회와 일본인 사회는 다른 삶을 살았을 뿐이다.

 

구룡포의 일본인들은 번창했다. 일제강점기 구룡포항에는 성어기(초가을~겨울)에 600여 척의 어선과 1만 명가량의 선원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600척 가운데 500척은 일본인이 선주였고, 동력을 갖춘 어선이 많았다. 조선인의 배 100척은 작은 목선이 고작이었다. 일본 어부들은 고기를 잡아 돈을 벌었고, 일본 상인들은 항구에 들어온 배에 식량과 생필품을 공급해 돈을 벌었다. 방파제를 쌓아 안전해진데다 매립으로 새로 생긴 땅까지 더해 일본인 거리는 해안을 따라 커져만 갔다. 고급 여관(대등여관), 일급 요릿집(일심정), 기업 규모로 커진 회사들이 일본인 거리에 생겨났다. 반면 어로작업을 하는 선원의 95%는 조선인이었다. 구룡포 만의 통계는 없으나,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어획 소득 비중은 60%에서 53%로 줄어든 반면 조선에 있는 일본인의 소득 비중은 40%에서 47%로 늘었다. 1941년 기준으로 한반도 전체 어업 인구의 2%도 안 되는 일본 어부들이 어획에 따른 소득의 절반을 가져갔다는 얘기다. 구룡포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포항시는 2011년부터 예전 구룡포 일본인 거리를 복원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사업 초기 명칭은 ‘구룡포 일본인가옥 거리 조성사업’이었으나, 중간에 ‘구룡포 근대문화역사 거리’ 사업으로 바뀌었다. 일본인이 남기고 간 가옥 가운데 남은 집은 51채로 파악되었다. 470여m에 이르는 거리의 예전 일본인 집을 복원하고, 하시모토의 집은 구룡포 근대역사관으로 꾸몄다. 대등여관은 호호면옥으로, 요릿집 일심정은 일본식 찻집 후루사토야로 바뀌었다. 적산가옥이 즐비했던 뒷골목은 관광객이 다시 찾는 ‘테마거리’로 새롭게 조명 받았다.

 

포항시는 2008년 일본인 가옥 가운데 5채를 선정해 문화재청에 등록문화재 지정을 신청했으나 보류되었다. 하시모토의 집도 2013년 문화재위원회 근대문화재 심사에서 등록문화재로 인정되지 못했다. 하시모토의 집이 일본 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90년 된 건축물이라는 평가는 받았으나, ‘구룡포 근대역사관’으로서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짚어내 살리지 못한 점이 지적되었다. 식민지 시절 일본인 거리를 드라마 세트장(‘여명의 눈동자’, ‘동백꽃 필 무렵’)으로 쓰는 일이야 나무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식민지 근대’의 자취를 관광자원으로만 활용하려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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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보리 990-3'에서 '경북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보리 223-1'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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