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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청여(淸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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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남사예담촌의 부부화화나무와 이사재 배롱나무연리지

 

 

 

이사재는 2003년 4월 17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대사헌 ·호조참판 등을 지낸 송월당(松月堂) 박호원(朴好元: 1527~?)의 재실로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1293번지에 있다. 상량문에 세정사팔월(歲丁巳八月)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857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홑처마 팔작지붕을 갖추고 있으며,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이다. 건물의 면적은 51.75㎡정도이며 대청을 중심으로 계자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지리산 들머리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의 이사재(尼泗齋)는 박호원(1527~1585)의 재실이다. 밀양이 본관인 박호원의 아버지는 호조 소속의 정3 내자시 부정을 지낸 박이, 어머니는 황희의 5대손으로 한성부판윤을 지낸 황맹헌의 딸이다.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박호원은 명종 1(1546)에 사마시에 급제, 1552년 문과에 급제하여 1555년 함경도 북평사가 되었다. 1562, 중종 무렵부터 나라를 시끄럽게 하던 임꺽정 토벌 때에 반국대적 토포사 남치근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웠다.

 

 

 

 

 

 

송원당 박호원은 이 임꺽정 토벌의 공으로 어느 역에서든지 말을 이용하는 숙마 11 필을 상으로 받았다. 또 이듬해에 세자시강원 보덕이 되고 1565년에는 동부승지가 되었다. 그리고 선조 9(1576) 대사헌, 1581년에 호조판서가 되었고 임진왜란 발발 7년 전인 1585년 세상을 떠났다.

 

 

 

 

 

담 밖에서 본 이사재의 배롱나무연리지입니다.

이사재의 배롱나무에는 연지리가 많습니다.

연지리는 남녀사이 혹은 부부애가 좋은 것으로 비유됩니다.  

이 나무의 연지리를 보는 연인은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 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연지리란 나무 가지가 서로 엉켜 마치 한 나무처럼 자라는 현상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곳 길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의 길 제4코스 산청구간입니다.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李舜臣 將軍, 1545~1598)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계락과 원균(元均, 1540~1597)의 모함으로 인하여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물러나 1597년(선조 30)  1월에 옥고를 치르고 판부사 정탁(鄭琢)의 구원으로 4월 1일 도원수 권율(權慄, 1537~1599) 휘하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 할 것을 명 받아 도원수부(都元帥府)가 있는 합천으로 가는 도중 단성현 사월리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하여 산청 단계변을 거쳐 합천 초계로 향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면서 권율 도원수부가 있는 합천 율곡부로 가던 길에 하룻밤 유숙하던 곳이다.

정유년 (1597년) 6월 1일 이순신 장군은 억수처럼 내리는 빗속에서 청수역을 떠나 단성에 이르러 박호원의 농사를 짓는 이곳 노비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한다. 이순신 장군은 이곳의 유력한 집안인 박호원의 내력을 알고 이곳에서 유숙했던 것으로 추적이 된다. 그러나 밤새도록 내리는 빗속에 방마저 좋지 않아 선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장군은 아침 일찍 삼가현을 향해 출발하였다.

 

 

 

 

 

 

송원당 박호원은 세종 임금 때의 명재상인 황희 정승의 5대 손녀와 결혼한 박이의 아들로 본관은 밀양, 호는 송원당이다. 그는 1562년 (명종 17년) 임꺽정 등 도적을 진압한 공을 세우기도 했고 호조판서, 참판을 엮임 하기도 했다. 이사재는 박호원의 재실이며 현재 이 지역에는 후손들이 살고 있다.

 

 

 

 

 

 

대문에서 바라 본 이사재 전경

 

 

 

 

이사재 (泥泗齋)

 

 

 

 

이사재 현판과 안청

 

 

 

이사재에서 바라본 남사예담촌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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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 : 회화나무

수령 : 310년

위치 : 경남 산청군 단성면 지리산대로 2897번 길 10

 

 

 


선비나무로 불리는 두 그루의 회화나무는 서로에게 빛을 더 잘 들게 하려고 몸을 구부리며 자랐고, 
부부가 나무 아래를 통과하면 금실 좋게 백년해로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부부나무로 불린다.

중국 주(周) 나라 시대에 삼공이 모여 정사를 논의한 것에서 유래되어 학자나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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