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작성자: 청여(淸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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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산청 남명기념관 탐방

남명선생 탄신 500주년을 기념하여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고 선생이 추구하고자 하였던 경의사상(敬義思想)을 계승·발전 시키고자 매년 국제학술회의, 남명 선생 관련도서 발간, 서사극 공연, 의병출정식 등 남명선비문화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선비 공원 조성, 남명석상(石像) 건립, 생각 및 용암서원(龍巖書院)복원, 남명학관 건립 등의 사업을 하였습니다.
남명기념관은 이러한 사업의 일환으로 계획되어 2004년 7월에 완공한 곳입니다.

남명 선생은 산청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좌 퇴계 우 남명이라 불릴 정도로 퇴계와 함께 우리 역사상 걸출한 선비였다
얼마나 대단한 선비였으면 선조 대왕이 그의 영전에 제문을 내려 푸른 선비의 기상을 기렸을까?

"ㄷ"자 형 건물로 지어진 "남명기념관" 오른쪽은 관리실과 기념품 판매점이 있고 중앙과 왼쪽에 전시실이 있다.

 

 

 

남명기념관의 정문의 이름은 성성문(性性門)이다. 성성((性性)의 뜻은 곧 깨달음이란다.

반듯이 들어갈때는 오른쪽으로 나올때는 왼쪽으로 아래 문특에 붙여놨다.

 

 

 

성성문을 들어서자 기념관 양쪽에 이글거리는 여름 태양아래 검붉게 핀 배롱나무 꽃이 아름답다. 

 

 

 

 

남명기년관 배롱나무

 

 

남명기년관 배롱나무

 

 

남명 조식(曺植, 1501 ~ 1572)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고 영남학파의 거두이다.
본관은 
창녕,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천문, 역학, 지리, 그림, 의약, 군사 등에 두루 재주가 뛰어났다. 명종 선조에게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안받았으나 대부분을 거절하였으며 아울러 한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썼다.

 

 

옥돌로 만든 남명선생의 동상

조식(曺植)의 자(字)는 건중(楗仲)이며, 경상도 삼가현 사람이다. 한미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와 숙부가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비로소 관료의 자제가 되어 사림파적 성향의 가학을 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30세까지 서울 집을 비롯한 부친의 임지에서 생활하며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혔고, 후에 명사가 된 인물들과 교제하였다. 조선 중기의 큰 학자로 성장하여 이황과 더불어 당시의 경상좌·우도 혹은 오늘날의 경상남·북도 사림을 각각 영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유일(遺逸)로서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졌으나 한번도 취임하지 않았고,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며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풍을 수립하였다.

그의 제자들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정인홍, 김우옹, 정구 등 수백명의 문도를 길러냈으며, 대체로 북인 정파를 형성하였다. 사후 사간원대사간에 추증되었다가 북인 집권 후 1613년(광해군 7년) 의정부영의정에 증직됐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남명선생이 명종과 선조대왕께 올린  상소문 비

당시 사회에 대한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양사에서는 "군주에게 불경을 범했다"며 그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대부분의 대신이나 사관들은 "초야에 묻힌 선비라 표현이 적절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 우국충정만은 높이 살 만한 것이다."라는 논리로 적극 변호하여 파문은 가라앉았다 한다.

 

 

 

남명 조식 선생의 화상찬(畵像贊)

 

 

 

신명사도(神明舍圖)

신명사도란 마음의 작용을 임금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나라를 다스리는것을 비유하여 도식화한 것이라 한다.
또항'신면사명을'을 지어 '신명사도'의 심오한 뜻을 밝혔는데 자신은 물론 제자들의 마음 수양에 도움을 주고자 했던 것이라 한다.

 

남명사상의 기틀

 

 

남명선생의 삶

 

 

처사의 삶

 

 

남명선생의 자취

 

 

 

의로움의 실천

 

 

합천 뇌룡정 전경 모형

조선 연산군 7년(1501)에 남명 조식이 지은 정자로, 1900년대 초 허위 등이 고쳐 지었다.
조식은 48세 때 합천군에 뇌룡정과 계복당을 짓고 학문을 연구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뇌룡정이란 장자에 나오는 ‘시거이용현, 연묵이뢰성: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과 같이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뢰처럼 소리친다.’에서 따 온 것이다.
정자는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덕천서원 숭덕사

경남 산청군 덕천서원에 배향하였다. 처음에는 남명 조식 선생의 위패만 봉안했다가 최 수우당이 사절하자 수우당(守愚堂) 최선생을 종사 했다. 그러다가 10년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병화로 소실되자 중건했으며 광해군 원년 1609년에 사액 되었다고 한다. 

 

 

 

 

산천재(山天齋)는 남명 선생이 61세 되던 해인 1561년(명종 16년) 합천 삼가에서 지리산 천왕봉(天王峯)이 바라보이는 덕산(德山) 사륜동(絲綸洞)으로 이주하여 학문에 정진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입니다.

 

 

 

 

여재실(如在室)

묘소는 산천재 뒷산에 있는데, 남명 선생이 생전에 잡아 둔 곳입니다. 여재실(如在室)은 선생의 후손들이 제사를 모시는 가묘(家廟)로서 선생과 정경부인(貞敬夫人) 조(曺)씨, 숙부인(淑夫人) 송(宋)씨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남명 선생이 돌아가시자 선조대왕께서 내리신 제문을 세겨 세운 비석이다.

 

남명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는 산청군 시천은 무엇이 500년전 한 선비를 이렇게 절절하게 기억하게 하는지....?


남명 조식 선생의 자취를 따라 가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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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1611-1'에서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 405'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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