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작성자: 청여(淸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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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동구에 있는 고려 전기 무신 신숭겸을 기리는 유적지 2024

 

 

 

신숭겸 장군 유적 [현지 안내문]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을 기리는 유적이다.

신숭겸(?∼927)은 평산 신 씨의 시조로서, 918년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의 건국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공은 그 뒤 대장군이 되어 927년(고려 태조 10)에 신라를 침공한 후백제 견훤의 군사를 물리치기 위해 왕건과 함께 출전하였다. 왕건이 이곳 공산싸움에서 후백제군에 포위되어 위기에 빠지자 자신이 왕건을 가장하여 맞서다가 전사하였으며, 왕건은 그 틈을 이용하여 홀로 탈출하였다고 한다.

 

 

 

왕건은 장군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지금의 춘천인 광해주에서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신숭겸이 순절한 이곳에 순절단과 지묘사(미리사)를 세워 그의 명복을 빌게 하고, 토지를 내려 이 곳을 지키게 하였다.

 

 

 

 

 

 

 

1607년(선조 40년)에 없어진 지묘사 자리에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이 서원인 충렬사를 세워 장군을 모셨으며, 1672년(현종 13년)에 표충사는 사액서원이 되었다. 1871년(고종 8년)에 서원철폐령으로 표충사가 없어진 뒤에 후손들이 재사를 지어 이곳을 지켜오던 중 1993년에 표충사를 복원하였다.

 

 

 

 

 

 

고려 전기 무신 신숭겸(申崇謙, ?~927)은 후백제와의 공산전투(公山戰鬪)에서 포위된 태조(太祖, 877~?)를 대신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태조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장절(壯絶)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전사한 자리에 지묘사(智妙寺)와 순절단(殉節壇)을 세워 명복을 빌었다.

 

 

 

 

 

 

시신은 광해주(光海州, 현재 춘천)에 안장되었다. 순절단은 신숭겸이 태조의 옷을 바꾸어 입고 피신시킨 후 싸우다가 전사한 자리로, 그곳에서 피 묻은 흙과 옷을 수습하여 묻고 쌓았다고 전해진다. 순절단을 수호하였던 지묘사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데 고려 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004년 유적지 경내에서 지묘사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었다.

 

 

 

 

 

 

고려시대의 충신 신숭겸은 고려군과 후백제군이 공산(현 팔공산)에서 치열하게 맞붙은 공산 전투에서 고려군이 패하자 목숨이 위태로운 왕건과 옷을 바꿔 입고 왕건을 대신하여 순국하였다. 그 당시 후백제군의 견훤은 왕건의 목을 노리고 있어 어쩌면 정말 긴박했을 상황. 이후 왕건은 후삼국통일 후 신숭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겨 현재의 자리에 그 업적을 기린 지묘사를 세웠다.

 

 

 

 

 

신숭경 장군의 순절단 좌측의 400년된 배롱나무입니다.

한 나무 두 나무가 아닙니다. 대 여섯 나무이네요.

 

 

 

 

1607년(선조 40)에 신숭겸의 외손인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柳永詢)이 옛 절터에 사당과 충렬비(忠烈碑)를 건립하고 표충단(表忠壇)을 쌓아 장군의 충절을 추모하였다. 1672년(현종 13) 사당은 표충사(表忠祠)라 사액(祠額)을 받았다.

 

 

 

 

 


순절단 내 비각입니다.

 

 

 

 

 

1819년(순조 19)에 후손 신의직(申義直)이 단을 중수하고 옆에 ‘고려장절신공순절지지비(高麗壯絶申公殉節地之碑)’를 세웠다. 1871년(고종 8) 서원 철폐령으로 표충사가 헐렸지만, 이후 후손들이 중건하였다.

 

비각이 있는 옆의 흐트러지게 핀 배롱나무 꽃입니다.

 

 

 

 

 

 

순절단 경내에서 눈길 가는 곳마다 진연분홍색의 배롱나무꽃입니다.

 

 

 

 

지묘사는 조선시대에 들어서 없어졌지만 조선 선조때 이곳에 표충사와 표충단, 충렬비를 세워 공을 기렸고 헌종 때 사액서원이 되었지만 고종때 서원 철폐에 의해 없어졌다. 하지만 그 이후 후손들이 맡아 관리하며 계속 보존되었고 현재 표충재 평산 신씨 문중이 관리하고 있다. 총 면적은 4만 5180㎡ 이며 주요 시설은 장절공, 충절비, 표충재와 동재 서재가 있다.

 

 

 

 

 

 

순절단에서 표충사로 올라가는 순절단 후문입니다.

이 길로 약 100m쯤 올라가면 표충사입니다.

 

 

 

 

 

표충사로 올라가는 길 양편에도 배롱나무 꽃이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위쪽에 표충사가 보입니다.

 

 

 

표충사로 올라가는 중에 순절단 경내의 배롱꽃이 아름다워 담아 봅니다.

담벽도 흙과 돌로 쌓아 너무 멋지네요.

 

 

 

 

[표충재와 동재 서재]
표충재는 뒤로 높다랗게 사당을 업고, 순절단이 내려다보이는 왕산 중턱에 있다. 표충재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중심 건물과 동재와 서재가 있다. 표충사는 일명 표충서원으로 불리면서 유림에서 지켜오다가 1871년 (고종 8)에 훼철된 뒤에는 순절단을 단소로 후손들이 향사를 받들었다. 여러 해 동안 영남 족친들이 건축비를 모아서 1888년(고종 25)에 표충사 옛터에 완공했다. 표충재 현판은 충익공 신정희가 썼다. 표충재 왼쪽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신숭겸 장군의 높은 절개를 추모하여 건립된 강당인 ‘상절당’이 있다.

 

 

 

 

 

 

 

표충사 서측 경역에는 후대에 건립된 강당 상절당(尙節堂)이 있다. 표충재 동쪽에는 1607년 건립된 ‘고려태사장절신공충렬지비(高麗太師壯節申公忠烈之碑)’가 세워져 있다. 충렬비의 비문은 신흠(申欽)이 짓고 김현성(金玄成) 이 글을 쓰고, 김상용(金尙容)이 전서(篆書)를 썼다.

 

 

 

 

 

 

 

 

 

 

용맹한 기상, 장군의 넋을 기리니  :  2024-17-23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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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건 고려 초대 왕으로서 25년간 재위하면서 국가 안정을 위해 호족 사회를 회유하고 토지제도를 바로 잡았으며 궁예 이래 가혹한 조세를 경감하는 등 융화정책, 북진정책, 승불정책 3대 건국이념으로 삶았다.

특히 신라를 항복시키고 돌아가는 견훤과  이 곳 공산에서 마주쳐 싸웠으나 크게 패하고 목숨까지 경각에 달렸을 때 신숭경, 김락 장군 등이 자기를 살리고 자신들은 장열하게 전사함으로서 후에 왕건이 찬란한 고려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수령이 약 400년이 된 이 팽나무는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을 기리기 위해 "태조 왕건 나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표충재 앞에 세워진 포토존 신숭경 장군 조형물이다.

인증사진 찍으실 분은 직접 찾아가서 찍으십시오.

 

 

 

 

 

포충재를 탐방할려면 해설사가 주관하는 시간에 신청이 가능하므로

시간이 맞지 않아 못들어 가봤습니다.

신숭겸 유적지는 오후 5시이면 문을 닫고 차량 출입이 불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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