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작성자: 청여(淸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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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시천면 덕산서원·산천재·남명기념관 둘러보기

 

 

 

 

올해 들어 덕산서원 두 번째 방문입니다.
집에서 04:40 출발 도착이 06:00 경 오늘 아침에도 옅은 안개가 끼여 시야가 별로인 아침입니다.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는 꽃이 많이 피었는데 서제 쪽의 한 그루는 꽃보기가 올해는 힘들겠습니다.
사당 숭덕사 입구의 배롱나무도 이제 개화상황이 매우 양호합니다.

 

 

 

 

 

 

덕천서원의 솟을대문 외삼문 시정문입니다.

들어갈 때는 오른쪽문으로 나올 때에는 왼쪽문으로 나오는 것이 도덕적인 예의입니다.

 

 

 

 

 

 

덕천서원은 남명 조식(1501∼1572)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그가 학문을 닦던 곳에 세운 서원이다.
조선 선조 9년(1576)에 지었고, 광해군 원년(1608)에 사액서원이 되어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았다.
고종(재위 1863∼1907)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30년대에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숭덕사 배롱나무꽃 지난해 이때 쯤 촬영했을 때보다는 못하지만은 그런대로 이제 찍을만합니다.

 

 

 

 

 

 

덕천서원 숭덕사 남명 조식선생을 배향한 사당 숭덕사입니다. 

 

 

 

 

 

 

 

청주에서 오신 진사님과 이곳 촬영을 마치고 반대편 산기슭에 있는 산천재와 남명 조식 유적기념관으로
동선을 옮겨 촬영을 하였습니다.

 

 

 

 

산천재

 

지리산 천왕봉 아래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있는 산천재의 뜰에는 남명 조식(曺植, 1501~1572) 선생이 61세이던
해에 지은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명종 16년(1561)에 세웠고, 순조 18년(1818)에 고쳐졌다.

 

 

 

 

 

 

 

산천재의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이다. 남명 선생은 영남의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룰 만큼 호남 학파의 수장이다.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죽어서 사간원(司諫院)과 대사간(大司諫)에 이어 영의정에 추서된 위인이다.

산천재 앞에 자라는 매화나무는 선생이 산천재가 완성되던 1561년에 직접 심었다고 전해온다. 수령이 450년이 넘은 매화나무로 남명매라 불린다. 정당매, 원정매와 함께 산청 3매로 불리는데, 매화가 만개하는 3월 말이 되면 짙은 매향을 맡으려는 수많은 탐매객이 찾아든다.

 

 

 

 

 

 

선생은 1501년(연산 7년)에 경상도 삼가현에서 태어나 벼슬길에 나아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주하였다가 그 후 의령, 김해, 삼가 등지에서 거주하였다. 선생은 61세가 되던 해에 산청의 덕산으로 이주해 그곳에 서실을 짓고 산천재라 이름하였다.

 

 

 

 

 

 

 

 

산천재의 후원. 배롱나무꽃이 아직 덜 피었네요.

 

 

 

남명기념관

 

산천재를 둘러보고 남명기념관으로 뱔결음을 옮겼습니다.

남명기념관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영남학파의 거두인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의 300준년을 기념하기위해 
2004년 7월에 완공 된 전시관이다.

 

 

 

 

 

 

남명선생은 산청을 대표하는 인물로 '좌 퇴계' '우 남명'이라 불릴 정도로 불릴 정도로 퇴계와 함께 우리 역사상 걸출한 선비였다. 얼마나 대단한 선비였으면 선조대왕이 그의 영전에 제문을 내려 푸른 선비의 기상을 길렸을까...?

남명선생이 돌아 가시자 선조대왕께서 내리신 제문을 세겨 세운 비석이다.

 

 

 

 

 

 

옥돌로 만들어 세운 남명선생의 동상
남명 조식의 탄생 500주년을 맞은 2001년 설립을 추진해 2004년 8월에 문을 연 곳이 남명기념관이다. 남명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유품과 관련 자료들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남명기념관은 산천재 맞은편의 2차선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왼쪽에 옥돌로 만들어진 남명선생의 동상이 지리산을 등지고 서 있다. 신도비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지은 것으로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잘 나타내었다. 여재실은 문중에서 선생에게 제사를 드리는 가묘가 있는 곳이다.

 

 

 

 

 

 

 

진분홍 꽃이 활짝 핀 배롱나무를 걸고 남명선생 동상을 배경으로 담아 봤습니다.

 

 

 

 

 

 

 

남명 조식 선생은 산청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다. 태어난 곳은 이웃한 합천군 삼가면 토동이지만, 61세에 산청군 덕산으로 옮겨와 산천재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72세이던 1572년 2월 산천재에서 운명했다. 11년간 지역 사람으로 살면서 이곳에 묻혔다. 남명 조식 유적은 두 곳으로 나뉘는데, 사리에는 산천재, 별묘, 신도비, 묘비가 있고, 원리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조식선생은 25세때 원나라 선비인 노재 허형의 '모든 일은 낱낱이 살피어 물질을 쫓아갈 것은 아니다' 라는 말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이후 학문 연구에 더욱 열중하였다고 한다. 

 

 

 

 

 

 

 

남명선생의 사상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실행에 중점을 두어 직절하고 의리있는 꿋꿋한 선비정신이다. 선생의 학문은 경의학으로 알고서 올바르게 실행해야 한다는 점을 중시하였다. 둘째는 자기의 맡은 직분에 충실할 것과 백성과 선비가 나라의 근본이라고 했다. 몇 차례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정치하는 도리만 설명하고는 번번이 돌아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남명선생의 사상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실행에 중점을 두어 직절하고 의리있는 꿋꿋한 선비정신이다. 선생의 학문은 경의학으로 알고서 올바르게 실행해야 한다는 점을 중시하였다. 둘째는 자기의 맡은 직분에 충실할 것과 백성과 선비가 나라의 근본이라고 했다. 몇 차례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정치하는 도리만 설명하고는 번번이 돌아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묘소는 산천재 뒷산에 있는데, 남명 선생이 생전에 잡아 둔 곳입니다. 여재실(如在室)은 선생의 후손들이 제사를 모시는 가묘(家廟)로서 선생과 정경부인(貞敬夫人) 조(曺)씨, 숙부인(淑夫人) 송(宋)씨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이상 2023.7.30 산청 덕산서원과 남명 기념관을 둘러 보고 왔습니다.

날씨가 무더워 새벽 04:30 출발 09:00까지 마무리하고 귀가한 번개출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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