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작성자: 청여(淸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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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유민의 충절이 깃든 함안 고려동 유적지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에 있는 조선시대 고려 유민들의 마을. 시도기념물. 1982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곳이다.
이 곳은 고려 말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 이오(李午)선생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고려의 유민으로 절의를 지키기로 결심하고 백일홍이 만발한 이 곳을 택해 거처를 정한 뒤 그 후손들이 살아온 장소이다.

함안 산인 고려동유적지

고려가 망하자 선생은 여러 현인들과 송도의 두문동에서 망복수의(罔僕守義)의 결의를 표명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거처를 찾던 중, 산간벽지에 띠만이 우거진 숲 속에서 백일홍이 만발한 것을 보고 그 자리에 마을의 터전을 일궜다. 그 자리는 오늘날 자미단(紫微壇)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함안 산인 고려동마을

이오는 끝까지 고려의 유민임을 나타내기 위해 은거지 주변에 담을 쌓아 밖은 조선의 영토라 할지라도 안은 고려 유민의 거주임을 명시하는 ‘고려동학(高麗洞壑)’이라는 표비를 세웠다. 여기서 ‘담안’ 또는 ‘장내’라는 마을이름이 유래되었다.
이오는 세상을 뜰 때까지 조선에 벼슬하지 않았다. 아들에게도 신왕조에 벼슬하지 말 것과 자신의 신주를 이 곳을 떠나 딴 곳으로 옮기지 말도록 유언하였다. 또한 담 안에 주거를 만들고 우물을 파 전답을 개간하여 자급자족할 수 있는 후손들의 터를 만들었다.

함안 고려동 유적지 중 유적비 일원

선생의 유언을 받든 종손들은 19대 600년에 이르는 동안 이 곳을 떠나지 않았고 이에 고려동(高麗洞)이라는 이름으로 오늘까지 이어왔다. 현재 이 마을에는 30호의 후손들이 재령이씨(載寧李氏) 단성의 동족마을로 그 순수성을 지켜가고 있다.

함안 산인 고려동마을

마을 안에는 고려동학표비(高麗洞壑表碑), 고려동(高慮洞)담장, 고려종택(高麗宗宅), 자미단(紫微壇), 고려전(高麗田) 30,000여 평, 자미정(紫微亭), 율간정(栗澗亭), 보정(鰒井) 등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건물들이 6·25전쟁 때 소실되어 이후 재건된 것이다.

함안 산인 고려동마을
현재 주택으로는 호상공의 생가로 알려진 주택이 유일하게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200년을 넘지 않았다. 자미정을 포함하는 종가는 비교적 정교하게 재건되긴 했지만 조선 초기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고려동유적지(高麗洞遺蹟址))]

자미화 

배롱나무는 본래 당나라 때부터 관청의 뜰에 심어두고 보기를 좋아했다고 하며, 배롱나무를 자미화(紫薇花)라고도
부른다고 합니다. 

 

보호수 자미화

고려동 유적지의 배롱나무는 보호수로 연륜에 비해 수관이 발달하고 수형이 아름다워 자미나무라고도 하며 이나무에서 
피는 자미화는 고려말 이오선생의 고려에 대한 충절을 상징하는 꽃이라 전해 내려온다고 합니다.

고려동 유적지

 

 

 우물 복정

모곡리 장내동에 있는 우물 복정

 

 

고려동 비각과 상의문

 불사이군의 정신이 깃든 함안 고려동 유적지
고려가 망하자 여러 현인들과 송도 교외의 두문동으로 들어가 망복수의의 결의를 표명하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산인면 모곡리에 터를 정해 은거했습니다. '두문불출'이란 말이 이때 생겨난 말인데, 두문동에 들어간 사람은 전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안에서만 있으니 나온 말입니다.
고려의 국운이 약해졌던 고려 말, 삼은으로 불리던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는 대표적인 고려 말의 충신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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