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작성자: 청여(淸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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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가볼만한 곳] 거제도 칠천량해전공원 전시관 탐방


칠천량 해전

임진왜란·정유재란 가운데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이다.

임진왜란 중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1월 다시 조선을 침범했다. 일본은 지난번 조선 침범이 실패한 것은 바다를 제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해 먼저 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제거하려는 이간책을 꾸몄다.

당시 조정에서는 중신들이 당쟁에 휘말려 이순신을 하옥하고 원균을 수군통제사로 임명한 상태였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부산 근해로 유인해 섬멸하려고 일본의 이중첩자인 요시라(要時羅)를 시켜 유혹했다.이에 도원수 권율(權慄)은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과 상의해 원균에게 출전명령을 내렸다. 원균은 무모하게 출전해 보성군수 안홍국(安弘國) 등을 잃고 되돌아왔다. 그리고 한산도의 본영(本營)에 앉아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웅천(熊川)을 급습하도록 하였다.배설이 전선(戰船) 수십 척을 잃고 패하자, 권율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원균을 태형(笞刑)에 처한 뒤 다시 출전하라고 명하였다.원균은 부산의 적 본진(本陣)을 급습하려고 삼도 수군 160여 척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하였다. 7월 14일 원균은 부산 근해에 이르러, 이 사실을 미리 탐지한 적들의 교란작전에 말려들어 고전하였다.더욱이 되돌아오던 중 가덕도에서 복병한 적의 기습을 받아 400여 명을 잃었다. 원균이 칠천량(지금의 거제시 하청면)으로 이동하여 무방비 휴식 상태에 있을 때 적은 조선 수군을 기습할 계획을 세웠다.도도(藤堂高虎)·와키사카(脇坂安治)·가토(加藤嘉明) 등 수군 장수들이 7월 14일 거제도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15일 달밤을 이용해 일제히 수륙양면 기습작전을 개시하였다.이에 당황한 원균과 여러 장수들은 응전했으나 적을 당해낼 수 없어 대부분의 전선들이 불타고 부서졌다.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 수군 장수들이 전사하였다. 원균도 선전관 김식(金軾)과 함께 육지로 탈출하였다.그러나 원균은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경상우수사 배설만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남해 쪽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하였다.이로써 삼도 수군은 일시에 무너지고 적군은 남해 일원의 제해권을 장악해 서해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우키타(宇喜多秀家)·고니시(小西行長)·모리(毛利秀元) 등은 쉽게 남원 및 진주 등지로 침범하게 되었다.조정에서는 7월 21일 원균과 함께 탈출하다가 원균은 죽고 겨우 살아 나온 김식에게서 패전 보고를 듣고 크게 놀라 백의종군(白衣從軍)하고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해 수군을 수습하게 하였다.

(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칠천량해전공원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최대 패전으로 기록된 칠천량 해전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념공원이다.
칠천량해전은 1597년 7월 원균의 지휘 아래 조선 수군이 도도 다카토라 등이 지휘하는 왜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전함 180척 중 150척이 침몰하면서 1만명의 병사가 숨진 조선 수군 최대의 패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칠천량
해전공원 (도시근린공원)

주소:경남 거제시 하청면 연구리
전화 055-639-8250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를 흐르는 칠천량 바다는 임진왜란 초기부터 조선 수군 함대가 자주 정박하던 곳이다.
칠천량해전 공원에서 바라본 칠천량해전 무대였던 칠천도 앞 바다(파노라마)

 

 

새벽 나절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기를 "모레 전에 수군이 피습되어 통제사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이 전사하고 "수군이 궤멸했다."하였다. 들으며 통곡을 금할 길이 없었다.

난중일기 - 정유년(1597)

 

 

 

 

 

한국사 3大 패전(敗戰)중 최악의 흑역사: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
임진왜란의 해전. 조선수군이 캐발린 굴욕의 전투로 당당히 그 수치스런 이름을 남기고 있는 전투다. 대한민국 국군에선 쌍령 전투, 현리 전투와 함께 한국사 3대 패전 중 하나로 꼽고 있다. 약간의 이견이 있긴 있으나 일반적으로 3대 패전 중 가장 최악의 전투로 뽑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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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당시 침몰했을때를 시뮬레이션한 영상과 모형들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배안 공간의 단면도 입니다. 각자의 역활에 맞는 수군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칠천량 해전 당시 일본군이 처한 상항과 조선군이 처한 현상을 나타낸 상항입니다.

 

 

 

 

무신 집안에서 태어난 원균(1540~1597년)은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나고 용맹했다고 한다.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고 특히 북방 오랑캐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워 조정으로부터 신망1) 을 얻었다. 경상 우수군절도사로 임명되고 3개월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어려움을 겪은 원균은 전라 좌수군절도사 이순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함께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승리의 공이 이순신에게 크게 돌아가고, 자신보다 경력이 짧은 이순신이 1593년 삼도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그의 지휘를 받게 되자 둘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옥되고, 뒤이어 삼도 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은 수군을 이끌고 칠천량에서 일본군과 맞섰으나 크게 패하였고 그곳에서 전사하였다.

 

 

 

 

 

 

 

 

이곳 칠천량해전 전시관을 방문하면 임진왜란때 우리 수군의 상항과 칠천도 해전 그리고 명랑 대첩의 역사적인 배경과
의미를 소상히 알 수 있습니다.

전시관 규모가 그리 큰 편은 아니라서 휘리릭 둘러보고 나오긴 했습니다.
21년 7월 18일촬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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