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작성자: 청여(淸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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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통영 15코스 드라이브 여행

 

통영 죽림 충무도서관에서 출발 거제 방향을 가는 통영 마지막 코스로 도착지는 거제시 성포 사등면사무소,
주행거리 25.8km 주행시간은 41분  대교휴계소, 해간도를 탐방이면 머무는 시간은  2시간 정도는.....?


남파랑길 15코스 출발점인 통영 시립충무도서관
어~ 에전에 없었던 건물이네요, 근간에 들어선 건물인것 같습니다.
그런데 남파랑길 표지판을 찾아봐도 보이질 않습니다.

링크를 클릭하시여 주행코스를 확인 하십시오

http://kko.to/0pKP_Auf7

 

자동차 길찾기

'충무도서관'에서 '사등면사무소'까지

map.kakao.com


○  통영 15코스 가볼만한 명소

국가 문화유산 포탈 통영향교

♤ 통영 상륙작전기념관
♤ 섬 아닌 통영 섬 해간도 캠핑장

♤ 거제대교휴계소

 

국가 문화유산 포탈 통영향교

통영향교는 경상남도 통영시 광도면에 있는 향교입니다.
1983년 8월 6일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218호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향교는 지방에 설립된 국립교육기관으로, 교육과 더불어 성현들에 대한 제사도 같이 행했던 곳이다.
조선 고종 광무 4년(1900)에 진남군이 고성현에서 분리됨에 따라 1901년에 고성향교에서 떨어져 나와 지금의 위치에 세웠다.


공부하는 곳인 명륜당과 동·서재가 앞쪽에 위치하고 제사지내는 곳인 대성전과 동·서무가 뒤쪽에 위치하는 전학후묘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와 그의 제자, 우리나라의 여러 성현들을 모셨다.

 


현유의 위패를 봉안한 대성전입니다.
그 밖의 건물들은 정문인 풍화루, 사당의 출입문인 내삼문, 제사지낼 때 쓰는 그릇을 보관하는 제기고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제사만 지내고 있다.


1901년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현재까지 4차례에 걸쳐 중수되었다.경내의 건물로는 6칸의 대성전, 각 4칸의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7칸의 명륜당, 각 6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6칸의 풍화루(風化樓), 고직사(庫直舍), 내삼문(內三門)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대문격인 풍화루

조선시대에 항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향교의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통영 상륙작전 기념관

1950년 6·25전쟁 중 해병대 김성은(金聖恩) 부대가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통영반도에 최초로 적전상륙작전을 감행하여 통영을 탈환한 작전.


경남 통영시 현충길 83 (우)53034
지번무전동 940

운영시간 안내  화~일 09:00 ~ 17:00



1950년 8월에 접어들자 전선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동부 전선에서는 포항 외곽에서, 중부 전선에서는 왜관 등지에서 혈전이 계속되었고, 서부 전선에서는 진동리로 침입한 적이 마산·진해·부산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병대의 맹렬한 공격에 의해 공격 기세가 꺾여 본래의 의도인 마산·진해·부산 등지로 직접 침입하는 것이 곤란해지자,
거의 무방비상태에 놓여 있는 통영반도를 먼저 점령한 뒤 거제도를 점령하여 마산항과 진해만을 봉쇄하려고 하였다.



예상한 바와 같이 1950년 8월 16일 미명을 기하여 고성으로부터 통영으로 향한 북한군 제7사단 제51연대와 제104치안연대의 650명이 1950년 8월 17일 새벽 1시통영시내로 침입해 왔다.
이와 같이 긴박한 상황이 발생하자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즉시 거제도에 상륙하여 통영으로부터 거제도에 침입하려는 적을 격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50년 8월 17일 새벽 3시김성은 부대는 해군함정 512호정과 평택호에 나누어 타고 통영반도 동북방 1㎞ 지점에 있는 지도(거제도 북방 연안)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거제도 서해안을 방어하는 것보다 통영반도에 상륙하여 적을 섬멸하는 것이
작전상 유리하다고 판단, 통영 근해를 경비하던 해군함정 703·901·504·512·302·307호정 및 평택호 등의 지원 엄호하에 8월 17일 18시 통영반도 동북방에 있는 장평리에 상륙을 개시하였다.


 
한편, 해군함정들은 협조된 계획에 따라 통영항 내에 접근하여 매일봉·남망산 및 부두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해병대를 상륙시킨 512호정과 평택호도 남하하여 함포 사격에 가담하였다.
적은 해병대가 통영항구 정면으로 상륙할 것으로 판단하고, 고지에 배치하였던 병력을 통영 남해안 일대에 집결시켜
해안선에 배치시켰으므로 접전 없이 상륙할 수 있었다.
 
 
 
 
상륙을 완료한 해병대는 밤을 새워 가며 맹렬한 공격작전을 감행하여 8월 18일 새벽 제2중대가 원문고개로 진격하여
방어진을 구축하고, 제7중대는 통영전투에서 승패의 관건이 되는 매일봉을 점령하였다.
이에 당황한 적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8월 18일 12시부터 해군함정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8월 19일 10시까지
통영시내 소탕작전을 벌여 잔적을 완전히 소탕하였다.
 
 
 
 
해병대의 적극적인 소탕작전에 전의를 상실한 적은 퇴로를 차단당하자 목선 3척을 이용하여 해상으로 도주하다가 해상을
경비하던 504·512호정에 의해 격침되었다.
통영상륙작전을 성공리에 완수한 해병대는 적의 유일한 공격로이며 통영 공격의 전술상 요지인 원문고개에 강력한
방어진을 구축하여 빈번히 습격해 오는 적의 대부대를 치열한 육박전을 감행하면서 격퇴시켰다.

 

1950년 9월 23일 서울탈환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인천으로 출항할 때까지 통영을 평정하여 당시 이 작전에 종군했던
외신기자들은 「귀신잡는 해병」이라는 특필보도로 저마다 최대의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작전에서 적 사살 469명, 포로 83명, 따발총 128정, 아식소총 107정, 권총 13정, M1소총 3정, 기관단총 14정,
박격포 2문, 지프차 2대, 트럭 10대, 전화기 5대 등과 많은 포탄·수류탄 등을 빼앗는 대전과를 올렸으며, 아군은 19명이
전사하고 47명이 부상을 하였다.

 


이 작전은 우리 해군·해병들이 최초로 성공시킨 단독 적전 상륙작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유엔군을 방어하기 위한 철수작전 중 유일한 공격작전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섬이 아닌 통영의 섬 해간도 

경남 통영시 용남면 해간길  구)거제교 초입에서 구불구불 해안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섬이 아닌 섬을 하나 만날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육지와 연결 된 해간교가 건설 되어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거나 하지 않고 자동차로 이동이 가능합니다.

 

 

통영의 맑은 바다와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할 수 있는 곳
빨간 등대 아래서 가족 단위로 바닷 낚시도 즐길 수 있어 낭만이 있는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펜션, 캠핀장 소소하게 이름이 난곳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 캐핑장은 소규모 단위로 나 같으면 차박하는것도 좋지 않을까 입니다.

 

성포까지 완주할려고 했드니 암만해도 안되겠네요, 내일 다시 연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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